Marcus Bullock: An app that helps incarcerated people stay connected to their families |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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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8 ・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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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Bullock: An app that helps incarcerated people stay connected to their families | TED

36,473 views ・ 2019-11-08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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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검토: Jihyeon J. Kim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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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저녁,
그 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은 저와 저녁뉴스를 보고 나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답해줘야 할 질문을 했습니다.
전 보통 여덟 아홉 살은 되야 어려운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이불을 덮어주는 동안 제 눈을 똑바로 보며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아빠는 왜 감옥에 갔어요?"
아내와 저는 이런 순간에 대해 종종 생각했어요.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우린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잘 대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 대답해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감옥에 가게 됐는지 아들에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겨우 15살이었을 때 일이었죠.
이 사진은 제가 열네 살 때 찍은 거예요.
저의 어머니와
저의 누이가 있고,
저 귀여운 작은 아기는 제 조카예요.
지금 스물세 살인데
제가 얼마나 나이들었나 생각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웃음)
이건 제 인생 최악의 판단을 하기
몇 주 전에 찍은 거예요.
저의 한 친구와 저는
자신의 차 안에서 자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총을 꺼내 들고
그의 차 열쇠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차에 타 줄행랑쳤죠.
그 일로 전 판사 앞에 서게 됐고
저의 어머니와 누이는 제 몇 발자국 뒤에서
최고로 경비가 삼엄한 성인감옥에 8년간 수감되는 형이
언도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죠.
이건 어머니와 찍은 가족사진이에요.
하지만 이번 것은 감옥면회실에서 찍은 거예요.
여기 배경에 있는 폭포나 나무 같은 것에 속으면 안돼요.
(웃음)
이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사실, 처음 2년은 우울증과 싸웠습니다.
징역형을 부정하며 살았죠.
전 어머니에게 "있잖아요, 엄마,
엄마도 판사가 성탄절이 지나도록
우릴 이렇게 둘 거라고 생각하진 않죠?" 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게 발렌타인데이가 되고,
학교 방학일이 되고,
또 학교 개학일이 되고
그렇게 계속 되었어요.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누군가가
내가 이 감방에서 죽어가는 걸 지켜볼 거라고 했다가
단지 혹독한 인생공부를 위한 거였다며 다시 숨쉴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줄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 대니 비와
감옥 마당을 걷다가
이 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물었어요.
그는 벌써 31년째 복역중이라고 대답했죠.
제 손바닥은 바로 땀에 젖었고,
심장은 발 위로 내려 앉았고,
전 벽돌로 왕창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제서야 8년을 복역해야 한다는 걸
직시했거든요.
요즘에 십대가 감옥에 가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저희 가족에겐 저희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들 중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어요.
전 가족들이 너무나 그리웠어요.
그리고 다른 십대들처럼
성탄절 아침에 선물을 풀어보고 싶었고
학교도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고 싶었어요.
감옥에선 보안이 철저해서
인터넷사용도 제한되었고요.
이메일도 쉽게 못 하고,
문자메세지도 못 하고,
소셜미디어도 당연히 전혀 못 해요.
졸업무도회나 대학졸업 같은 중요한 순간이나
여러분과 제가 매일 자유롭게 접하는 수많은 내용들을
감옥에 있는 사촌, 형제, 친구와는 거의 공유할 수가 없다는 뜻이죠.
저는 아주 음울해졌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꿈이 사라져 버렸어요.
매일밤 감옥 안 주거동의 철문이 세게 닫힐 때 들리는
철커덩거리는 소리에
저는 빨리 자라 버렸습니다.
제 경험으로 얘기하는 건데요,
강렬한 느낌의 재소자카드에는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전 어머니를 밀어내기까지 했어요.
어머니가 수신자부담전화를 받고,
한 시간 면회하려고 여덟 시간을 운전하고,
감옥면회실에 들어올 때
그 끔찍한 신체체강수색을 당하는 게 싫었어요.
하지만 오늘 밤 여기 계신 많은 부모님들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리죠.
(웃음)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뭘 하셨냐고요?
어머니는 면회실에 앉아서
어머니는 약속하시길
매일 편지를 보내거나 사진을 보내주시겠다고 했어요.
바로 그날부터 제가 집에 갈 때까지요.
형기는 6년 남아 있었고,
우리 삶은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기 태평스런 분이
제가 무슨 여름 캠프에 있는 사람인양 면회실에 활기차게 들어오셔서는
사진들을 보낼 계획을 갖고 계셨던 거죠.
(웃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전 잘 몰랐지만,
제 삶을 구한 건 어머니의 편지들이었어요.
어머니는 치즈버거나,
백화점에서 파는 매트리스 사진을 찍으셨어요.
(웃음)
그리고 편지와 함께 보내셨죠.
언젠가 저도 기름기와 육즙 가득한 버거를 즐기고,
편안한 침대에서 자게 될 거라는 약속과 함께요.
어머니는 감옥 후의 삶이 있음을 확신하게 해 주셨어요.
실은, 제 친한 친구들이 어머니의 편지와 사진 속에서
간접 인생을 살기 시작했어요.
(웃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옥 전체에 전해주면서요.
8년간의 끝없는 악몽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인간성이 말살되고
나체로 몸수색 당하고
사람들이 시신용 자루에 담겨 운반되는 것을 본 세월 후에
저는 드디어 석방되었어요.
그 추운 2월 아침에 누가 저를 데리러 왔을지
모르시겠죠?
(웃음)
아, 아시는군요.
(웃음)
제 누이와 어머니였어요.
저희가 기도하며 기다렸던 날들이 드디어 저희 앞에 와 있었고,
철창 뒤에서 살았던 고통은 이제 지나간 거예요.
저처럼, 수감자들 대부분은 언젠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저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수감기간과 그 후에
일관된 지지를 받지 못해요.
이 투쟁은 진짜 현실이에요.
저 또한 집에 돌아오고 일을 찾기 위해 고투했어요.
식료품점부터 담보대출회사에 옷가게까지
입사지원서류의 질문들 중에
같은 질문이 꼭 있더군요.
반짝거리고 고동치면서
제가 체크해 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이제야 솔직히 말하지만
그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이 문제를 직면하게 될 거라는 걸요.
그래서 감옥생활에서 얻은 정신적 강인함으로 최대한 버텼어요.
하지만 40군데가 넘는 곳에서 불합격하자
저 역시 기가 꺾이기 시작했어요.
제 삶을 뒤찾을 줄 알았는데,
그 곳에서의 일들은 지나가고 상황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열다섯 살 아이였을 때 내렸던 결정이
그 순간까지도 저를 계속 쫓아오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구직활동을 하던 어느 날,
어떤 지원서류를 읽게 되었는데,
질문의 표현이 조금 다른 거예요.
이 번에는 이런 질문이었어요.
"지난 7년간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이제 8년 복역 끝낸 거잖아요.
(웃음)
전 제 판결은 7년도 더 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그 질문에 거짓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제 첫 직장을 잡았어요.
(박수)
저는 페인트가게에서 페인트를 섞는 일을 했어요.
그리고 손님들이 가게에 와서는
저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어요.
"이봐요, 마커스, 내 주방 페인트칠하는데 얼마 줘야 해요?"
"글쎄요, 존슨 씨, 저희는 주방에 페인트칠은 하지 않고요.
페인트를 팔아서 당신이 주방에 직접 칠할 수 있게 해 드려요. "
(웃음)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고, 저는 페인팅 회사를 차려서
페인트 가게의 손님들과
일거리가 계속 필요한 페인트공들을 이어주는 회사를 시작했어요.
한 두 해가 지나고,
전 그 페인트 가게를 떠났고,
저희 도급 회사를 계속 키워나갔어요.
그 이후로, 저는 사회로 돌아오는 많은 이들을 채용해 오고 있어요.
(박수)
저는 중범죄를 짓고도 오늘 여기에 섰습니다.
중범죄 "F" 글자를 가슴에 달고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처럼
어머니가 수년 전 약속했던 것처럼
감옥 후에도 여전히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전 최선의 삶을 살기 시작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저와 감방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제게 계속 전화 해서 제 새로운 생활에 대한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제가 여행을 갔을 때에도 사진을 원했고,
결혼을 했을 때에도 사진을 원했어요.
하지만 전 앉아서 편지를 쓰거나
제 핸드폰 속의 사진들을 인쇄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어요.
전 그들에게 "너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낼 수 있으면
모든 게 훨씬 편할 텐데." 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앱스토어를 뒤지다가
실패하고
플릭샵을 시작했죠.
(박수)
진짜 농담이 아니고요.
여러분
10억 달러 규모의 감옥전화 사업을 창출해 낼 것을 아셨나요?
일부 업체는 가격 후려치기를 일삼기도 해서
이 업계를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어요.
플릭샵으로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간단한 내용을 적어서 전송할 수 있어요.
저희는 그 사진과 내용을 99센트에 실물 엽서에 인쇄해서
이 나라 어느 곳의 어느 감방의 누구에게든 바로 우편으로 보냅니다.
(박수)
수백만 명의 가족들이 서로 찢어져 있습니다.
그저 편지 쓸 시간이 없고
휴대폰 사진을 출력할 방법을 못 찾고
봉투를 사러 가게 갈 시간이 없고
우표를 사러 우체국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요.
저희는 50가구의 가족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0가구,
그리고 500가구,
그리고 지금까지 14만 가구가 넘는
이 나라의 가족들을 연결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박수)
저희 사무실에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오곤 해요.
예를 들어, 제이슨은
"어젯밤에 격려의 말로 가득 찬 엽서를
열다섯 통이나 받았어요.
그래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라고 썼고요.
조지는
"오늘 사랑이 넘치는 엽서를 여섯 통 받았어요.
이런 최고의 사랑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썼지요.
때때로 전 플릭샵을 통해 수감된 부모에게
사진을 보내는 아이를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축복받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에는 백악관에까지 가서
형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할 수 있어요.
제 삶이 항상 이랬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제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아직도 가로 세로 2, 3미터 정도의 감방에서
무기징역에 43년을 더 복역해야 하는 22살 남자와 함께 지냈던 것이 생생하게 생각나요.
침대에 앉아서 우리 둘 다 이 곳에서
죽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도요.
대량 수감의 시대와
감옥에 수감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뉴스에서 우리가 보는 것들은
해결하려면 우리 모두 뭉쳐야 하는
큰 사회문제예요.
하지만 저는
가족간의 유대가 가장 필요한 때에
그것을 쌓는 일에 힘쓴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큰 바탕이 될 거라 확신해요.
저는 제 삶의 지금 이 단계를
지금 여기 서 있는 이 챕터를 정말로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 누가 저보다 훨씬 더 즐거운지 아시겠어요?
저희 어머니지요.
(웃음)
사랑해요, 엄마. 고마워요.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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